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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이 한강에서 황어 낚시를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5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7월 1일(을사) 5번째 “왕세자로 하여금 낚시하러 가는 두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게 하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성·윤봉 두 사신(使臣)이 장차 조강(阻江)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임금이 전송(餞送)하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몸이 평안치 못하였으므로 왕세자에게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연회를 열어 (그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창성과 윤봉이라는 명나라 사신들이 잠시 한강에 낚시를 가겠다고 한 모양이다. 이에 세종이 몸이 불편해 두 사신을 예를 갖추어 떠나보내지 못해 대신 왕세자를 시켜 태평관에서 접대케 한 것이다. 

세종이 정말 몸이 불편했던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아무튼 창성과 윤봉, 이 두 사신은 6월 15일 조선에 도착해, 세종이 경회루에서 직접 베푼 연회를 즐겼다. 며칠 후인 18일에는 양화도(지금 양화대교 부근)에서 배를 띄워 한강에서 황어(黃魚) 낚시를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실제 황어를 낚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아마 그 때 황어 손맛을 보지 못해 재도전하는 것인지, 아님 그 때 손맛이 그리워 다시 낚시를 하러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금 한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어가 그 당시에는 있었다니 새삼스럽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황어에는 송어처럼 담수형(淡水型)과 강해형(降海型)이 있는데, 담수형은 민물에서만 일생 동안을 사는 것들이고, 강해형은 바다를 드나드는 것들이다. 

담수형은 육봉형(陸封型)이라 하기도 하는데, 민물에 갇혀서 바다로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는 황어의 육봉형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바다를 드나드는 강해형 황어는 부화 후 1년 또는 수년간 살다가 다시 하천에 나타나서 산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어는 비교적 깨끗한 물에서 사는데, 서해로 유입되는 하천에 황어산지가 현재 거의 알려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인 듯싶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지금 서해에서는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물이 깨끗했던 과거에는 서해에서도 황어가 자주 발견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에는 김포반도에 위치한 통진현에서 산출된다고 나와 있고, 서유구의 '난호어묵지(1820년경)'와 '전어지'에는 "황어(黃魚)는 잉어와 아주 많이 닮았다. 비늘 색이 순수한 노란 색이어서 황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주로 서해에서 잡힌다"고 나와 있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한강에서 황어낚시

또한 1904~1911년 사이에 출판된 '한국수산지'에는 서울 용산(한강)에서 '이다'(Ida : 황어의 일본말 방언)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봄철 진객'으로 해마다 봄철만 되면 돌아오는 태화강의 수천 마리의 황어 떼를 한강에서도 볼 수 있는 날이 올지 기다려진다.

제공=대한민국 NO.1 낚시방송 FTV(김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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